스와니예 열여섯번째 이야기 고(古)조리서 저녁에 방문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디너 방문이라 가기 전부터 설레더군요.

스와니예에서 디너에 와인 페어링을 하는 경험은 언제나 기대되는 일입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좀 특별한데 이름부터 우리말로 되어 있죠. 'Ep 16'이 아니고 '열여섯번째 이야기'입니다.

원래 스와니예의 컨셉이 '현대 서울 음식'인데 이번 만큼은 고조리서에서 영감을 얻으셨네요.

물론 영감을 얻어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하셨으므로 기본 컨셉에서 벗어난다고 할 순 없고요.

다만 이번엔 다른 에피소드들보다도 그 모티브의 존재감이 영감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심 주제로 자리잡았습니다.

지난 에피소드 '13 Inspiration' 과 특히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따뜻한 물수건부터 내 주십니다.




따뜻한 식전 모과차.




이 메뉴판에서 외래어를 모두 찾으시오. (5점)

특별제작된 메뉴판에서도 셰프님이 이번 에피소드를 더욱 특별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기존의 구쁨에 해당되는 순서들이지만 이번에는 구쁨으로 뭉뚱그리지 않음으로써 디쉬 하나하나에 무게감을 좀 더 주는 모습입니다.

첫 메뉴는 가지찜입니다. 된장과 오징어로 짭짤한 감칠맛을 살린 버전과 메밀로 크리스피한 식감을 살린 두가지 버전이네요. 




도사쥬를 하지 않아 깔끔한 산미를 보여주는 Larmandier Bernier Terr de Vertus.




마니마니 채워 주세요..




다시마구이와 우엉포. 다시마구이는 잣 크림이 샌드되어 있고 우엉포는 우엉우엉한 맛이었습니다.




당근김치. 김치에 도미살을 곁들여 먹는 요리.




무주의 훈증 돼지고기. 작은 옹기를 열면 연기가 확 퍼지는 비주얼 연출이 아주 훌륭합니다.




양파 장아찌와 궁합이 아주 좋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훈제 베이컨인 건데, 아무래도 지금 우리한테는 고조리서보다 베이컨이 더 친숙하니까요..

한국의 고조리서에 이미 우리가 현대적인 또는 서양의 조리기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굉장히 비슷한 것들도 있었다가 이야기의 골자 중 하나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먹었던 것에 놀라기 보다는 이것이 우리나라 조리기법으로 전해지지 않은 것에 놀라야 할 듯 합니다.




당귀편.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마카다미아 슬라이스. 일부러라도 이런 조합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재미있죠. 당귀와 마카다미아. 




패랭이꽃의 색이 너무 예쁩니다. 요즘은 화전 먹을 수 있는 곳도 많이 없죠. 저도 화전 먹고 자란 세대는 아니긴 합니다만..




Ktima Gerovassiliou. 거의 멸종될 뻔한 포도 품종을 복원하여 와인을 만드는 그리스의 와이너리라고 합니다. 스토리가 이번 에피소드에 잘 부합하는 와인입니다.




전복김치. 비주얼은 물김치이네요. 특히 이 메뉴는 규합총서의 레시피를 거의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복, 무, 배를 얇게 겹쳤고 동치미에는 대파 오일을 곁들였습니다. 대파 오일의 컬러가 청량감을 더해주네요.




호박선. 이건 정말.. 먹기 아까운 요리. 얇게 썬 호박으로 기와를 표현하셨다고 합니다.

감사하긴 한데 죄송하게 굳이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으셨어요 말이 절로 나오던..




호박선을 라자냐로 재해석하고 고명으로 올린 올리브, 케이퍼 절임으로 밸런스를 맞추었습니다. 추가금을 내면 고명을 캐비어로 변경할 수 있습니다.




Domaine Louis Cheze Viognier.




향이 좋은 비오니에 와인.




배추만두. 이번에도 아름다운 플레이팅.




스와니예에서 특히 파스타 메뉴가 기대되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도우룸이 생겼어도 마찬가지.

여태까지 에피소드들 중 기억나는 파스타가 많긴 하지만 이 배추만두는 이것 때문에 이번 에피소드를 한 번 더 가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이 메뉴만큼은, '배추만두'는 이름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메밀전병, 만두속, 샬롯 건포도 고명에 감귤 제스트에 모든 요소들이 완벽한 시너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플한 이름이 폭발적인 맛을 내는 것도 아이러니죠.




다음 페어링은 Batic Rose.

Batic은 슬로베니아 와이너리로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 중 하나라고 합니다.

특히 고대 양조 방식을 그대로 쓴다고 하니 역시 이번 이야기와 일치하는 면이 있네요.




까베르네 쇼비뇽이지만 발효를 중간에 중단하여 단맛을 조금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고대미. 유일하게 참조한 고조리서가 별술되지 않은 메뉴였는데 고대미라는 것은 복원된 우리나라의 토착품종 쌀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것은 오래된 레시피가 아니라 쌀 자체가 예전에 먹던 쌀이라는 개념입니다. 요리 형식은 우니와 굴비 플레이크를 곁들인 리조또라고 할 수 있겠네요.

굴비 플레이크의 식감이 좀 튀긴 했지만 훌륭한 쌀 요리.




미네굴국. 구운 관자와 고수장아찌에다가,




진한 굴 육수를 부어




완성. 미네굴국의 완성은 이준 셰프님이 직접 해주셨는데 이 요리를 이 에피소드의 중심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라고.

이준 셰프님이 이번 에피소드의 발단인, 지난 에피소드의 난면부터 국물 요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두고 계시는데

한국인이 국물 한 숟갈 뜨며 식사를 시작하는 것도 단적인 예이고 한식에서만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곁들임술은 녹파주. 매 에피소드 때마다 맥주나 칵테일 등 페어링에도 다양한 시도를 해왔던 스와니예이기에 이번 페어링에 전통주가 있는 것은 거의 당연한 수순입니다.

녹파주는 이름처럼 맑고 깔끔한 전통술.



이준 셰프님이 전통주에도 관심이 많으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누룩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술을 청주로 분류하고 누룩을 사용하는 우리술들은 모두 약주로 분류하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주세법에 대한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죠.

이건 일제의 잔재라기엔 너무나 고치기 쉬운 사안인 것 같은데 어째서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세법 개정 건의를 어디로 하면 되는 건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진지)




파도처럼 맑은 녹파주.




메인 요리 커트러리. 라기올이 아니네.




Batic, Sivi Pinot "Orange Wine". 라벨에 빈티지가 아니라 since 연도 1592가 써 있는 게 흥미롭네요. 고대 양조 와인인 것이 더 중요한 아이덴티티라는 것이겠죠.




 피노 그리지오의 클론 종으로 화이트 품종이지만 부르고뉴 글라스에, 화이트 품종이지만 고기 요리의 페어링으로.




이것이 오렌지 와인이군요. 굉장히 성공한 마케팅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급격하게 와인의 한 분류로 자리 잡아가고 있으니 말이죠.




반죽으로 감싸 구운 돼지고기. 이번 에피소드의 메인 요리.




돼지고기에 밀가루 반죽을 발라 저온에서 구운 뒤 밀가루 반죽은 제거한 것인데 한마디로 수비드입니다.

위에는 표고 버섯의 일종인 송화 버섯 슬라이스를 올리고 흑마늘 소스, 콩나물 등.




미디움 레어의 조리상태. 돼지고기는 스와니예에서 메인으로 먹을 때가 제일 맛있는 것 같습니다. 조리도 완벽함.




녹고의 눈물. 후식 곁들임술은 제주 오가피 술입니다.




술 한 잔을 주신 뒤 이렇게 주안상을 내 주시는.. 더덕 아이스크림, 산삼병, 타락.

타락죽을 단순히 우유를 끓여 만든 죽으로 알고 있었는데 수운잡방에서는 막걸리를 넣어 발효유를 만드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막걸리 요거트인 건데 팥시루 고명을 곁들여 냈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맛있습니다.




고대의 산삼병과 스와니예의 산삼병. 산삼은 아니고 더덕으로 만드는 것이고 왼쪽의 떡은 부드럽지만 심심한 맛이었고 오른쪽은 샌드는 넘넘 맛있었습니다.




당연히 꼬두라미도 고조리서 스타일로.

그러나 정과는 토마토, 포도, 키위 등 스와니예 스타일로.




고조리서는 로네펠트가 낄 자리가 없습니다. 국화차나 우엉차를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고종 황제도 가배차를 즐겼듯 커피는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와니예는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항상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3개월에 한 번 꼴로 가는 셈인데 이게 만약 숙제처럼 느껴진다면 안 가는 에피소드도 생기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진 매 에피소드가 만족스럽고 다음이 기대되고 그렇습니다.


사실 3개월마다 메뉴를 갈아 엎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겁니다.

가는 입장에서는 매 번 새로운 식당을 가는 기분으로 즐거운 일이겠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3개월마다 새로운 식당을 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고되고 부담스러울까요.


그렇게 이 열여섯번째 에피소드에서 스와니예에 어떤 터닝포인트가 온 듯 합니다.

작년에 미슐랭 별을 획득하신 것도 물론 엄청나게 축하드릴 일이지만 이준 셰프님이 이번에 이 고조리서라는 메뉴를 선보인 것이 더 큰 이벤트로 느껴집니다.

뭐랄까요 약간 각성하셨다는 느낌 같은 걸 받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스와니예는 더욱 기대가 됩니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 오고 있는 스와니예 팀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고 감사를 드립니다.






스와니예

SOIGNÉ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39길 46

http://soignerestaurantgroup.com/wp/soigne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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